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라야마 도미이치 (문단 편집) === 정계 입문 이후 === [[1955년]]에 [[일본사회당(1945년)|일본사회당]]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, 시의원과 현의원을 거쳐 [[1972년]] 첫 중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내리 8선을 했다. 중의원 임기 중 일본 정계에서 복지와 보건 문제에서 1인자로 꼽혔으며 관련하여 자민당 주도 내각에 늘 날카로운 비판을 날리기도 했다. 그덕에 이름값을 높여 [[1991년]] 일본사회당의 요직인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[[1993년]]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과반수가 무너지자 [[하타 쓰토무]], [[오자와 이치로]]의 [[신생당]], [[호소카와 모리히로]]의 [[일본신당]], [[공명당]]의 이시다 코시로, [[민사당]]의 오우치 케이고, [[다케무라 마사요시]]의 [[신당 사키가케]], [[에다 사쓰키]]의 [[사회민주연합]]과 연합하여 '''전후 최초의 [[호소카와 내각|非자민·非공산 7당 연립정권]]에 참여'''했다. 그러나 [[1993년]] 중의원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은 [[신생당]], [[일본신당]], [[신당 사키가케]] 등의 자민당 탈당파들이 만든 신당에게 표를 잠식당하면서 의석 수가 기존 '''136석에서 70석으로 줄어드는 참패'''를 당했으며 이 때문에 연립정권 내에서도 가장 많은 의석수를 가지고도 총리직을 [[일본신당]] 소속의 [[호소카와 모리히로]]에게 넘겨줄수밖에 없었던것은 물론이고 각료 배분에서 고작 7자리만을 얻는[* 운수대신, 건설대신,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, 국토청 장관, 경제산업청 장관, 무임소대신[* 한국으로 치면 [[무임소장관]]에 해당되는 국무대신이다.]] 심한 불이익을 당했다. 결국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야마하나 사다오 중앙집행위원장이 물러나면서 2인자인 무라야마가 중앙집행위원장 자리를 넘겨받게 되었다. [[호소카와 모리히로]] 총리가 [[사가와 규빈 사건]]으로 퇴진한 후에는 오자와의 [[신생당]], 이시다 위원장의 [[공명당]]과 대립하면서 연립에서 이탈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결국은 같은 구성으로 [[하타 내각]] 참여에 합의했다. 그러나 총리 지명 이후 연립 여당의 일원이었던 민사당이 일본사회당을 제외한 여당에 통일 회파의 결성을 호소하자[* [[오자와 이치로]]가 일본사회당을 배제한 정계재편을 위해 [[민사당]]을 배후에서 움직였다는 것이 정설이다.] 이에 분노한 무라야마와 일본사회당은 하타 내각에서의 이탈을 선언했다. 결국 소수 여당으로 하타 정권은 2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